지난 1월. 서울로 이사를 오고 서울 나들이 첫 공식 일정은 연남동 방문이었다. 서점 리스본에 들러 1월 비밀책을 샀다. 포장에는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의 무슨 의미가 있나'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란 책이었다. 책을 샀던 그 계절감에 어울리는 1980년대 겨울 아일랜드가 배경이었다. 120페이지의 짧은 소설이라 빨리 읽을 수 있었지만 빨리 읽어버리기 어려운 책이기도 했다.
<이토록 사소한 것들>은 아일랜드 정부의 협조하에 가톨릭 수녀원이 운영하면서 불법적인 잔혹 행위를 저질렀던 ‘막달레나 세탁소’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막달레나 세탁소에는 매춘부나 미혼모인 젊은 여성들이 수녀원에 은폐, 감금을 당한 채로 세탁부로 강제 노역을 당했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성폭행 피해자나 고아 소녀도 부당한 이유로 강제 수용되었고 미혼모의 경우 자녀들을 강제로 빼앗겨 입양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만행은 약 74년 동안 이어졌다.
책을 접하며 겨울을 맞았는데 시간이 흘러 12월이 되었고 또다시 겨울을 맞았다. 그리고 이 책을 읽은 할리우드 배우 킬리언 머피가 직접 제작 및 주연을 맡아 영화를 만들었고 드디어 개봉되었다. 지난 22일, 어떻게 극화되었을지 궁금했고 상영 후에는 GV도 있다고 해서 얼른 예매하고 관람했다. 영화는 원작에 충실히 기반을 두고 제작되었다. 소설의 여운을 그대로 담고 있어서 책의 내용을 더 깊게 느낄 수 있는 시간이 됐다.
주인공인 빌 펄롱은 석탄 판매 업체를 운영하는데 규모가 큰 거래처 중 하나인 수녀원에 갔다가 강제 입소 당하는 소녀의 모습을 보게 된다. 얼마 뒤, 수녀원으로 배달을 하러 가서 일전에 봤던 그 소녀가 석탄 창고에 갇혀 있던 것을 발견한다. 원장 수녀는 소녀를 펄롱에게 인계받고 그에게는 석탄 배달비와 더불어 입막음을 위한 웃돈을 얹어주며 아내에게 전해주라 건넨다. 수녀원에서 있었던 펄롱의 일은 이미 마을 안에 소문으로 돌기 시작했고 마을 사람 중 어느 한 사람은 펄롱에게 가만히 있으라, 흠 잡힐 일 만들지 말라며 조언해 준다. 펄롱은 목격한 모든 일들을 잊고자 자신의 일상에 몰두하려 애쓰지만 결국 마음의 소리를 따라 다시 수녀원 창고로 달려간다. 창고에는 또다시 소녀가 갇혀 있었고 펄롱은 그 소녀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소설은 나와 내 가족을 지키려 애쓰는 보통 사람들에게 불의로 스러져 가는 다른 이들을 돕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면 어떤 일이 펼쳐지는지를 가만히 보여준다. 무감각한 사람도 있고 외면하는 사람도 있고 눈길을 돌리지 말라고 붙잡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겠는 펄롱 같은 사람이 있음을, 그리고 마침내 그가 사람답게 사는 기쁨을 마음껏 느끼는 모습을 조용하지만 뜨거운 온도로 그려낸다.
나는 읽으면서 클레어 키건이 아일랜드의 한강 같다고 생각하게 됐다. 아프고 처절한 시간들에 돌아서지 않고 어떻게든 함께했던 존재들이 있었음을 한강 작가님은 그녀만의 필체로 고스란히 담아냈다. 처연하게 일렁이며 빛나는 촛불로, 거친 눈보라에도 꿋꿋이 선 나무들의 이미지로 대표되는 한강의 작품들은 그렇게 세계를 울렸고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이어졌다. 상흔은 끝내 지워지지 않지만 그 아픔을 통해 오늘의 대한민국이 이루어졌음을 모두가 실감하게 됐다.
이처럼 사람답게 산다는 기쁨. 우리는 그 기쁨을 어떻게 느끼며 사는가. 그저 바쁘게 일상에 치여 사는 게 익숙한 현대 사회에서 그런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올해, 나에게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만난 1월, 그리고 한강 작가님이 노벨문학상의 영예를 안게 된 12월이 있었기 때문에 책을 통해서 나는 그 맛을 조금 엿볼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였는지 모르지만 내 편에서 그 기쁨을 느끼고 나눌 수 있는 것들을 실천해 보는 한 해가 된 것 같다.
올 하반기에 나는 두 예배에 참석했다. 하나는 10월에 참석한 이태원 참사 2주기 기억과 추모의 그리스도인 예배였다. 나는 예배를 참석하게 되면서 추모공간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예전에 광화문에 세월호 추모공간이 있었던 것처럼 서울시청 근처에 이태원 참사 추모공간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함께 모여 유가족들을 위로하고 슬픈 이들과 함께하는 마음으로 예배로 나아왔다. 안전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그들을 잊지 않고 계속 노력하겠기로 마음을 정하게 됐고 그래서 올해부터 다시 할로윈 수업을 하기로 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내가 있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또 하나는 12월에 참석한 세월호 가족과 함께하는 성탄예배였다. 10년 만에 처음으로 서울에서 열리는 성탄예배라고 했다. 갑자기 부쩍 추워진 날씨에도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서울시의회 앞 기억관에 모여 희생자들의 이름을 부르며 그들을 기억하고 유가족들을 위로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렸다. 1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오지 않은, 안전하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자는 다짐을 되새기는 시간이 되었다.
물론 이 두 예배에 참석하게 된 것은 남편의 공이 컸다. 예전에 나였다면 이런 예배가 있는지도 알지 못했을 테니까. 그런 면에서 나는 남편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롬 12:15) 하신 말씀이 있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그 말씀을 실제적으로 실천하며 사는 법을 깨닫는 건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했던 일들이 세상 속에 슬퍼하는 이들을 외면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단위의 실천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함께 우는 자들과 잠깐이라도 함께 하는 것, 그리고 그들을 잊지 않으려 노력하고 기억하는 것.
가볍고 당당하게 소녀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 밝고 빛이 비치며 꽃이 핀 쪽으로 이끄는 소년의 손. 아직 헤어진 건 아니라 다짐하는 말. 우리로 사람답게 살게 하도록 만드는데 필요한 것은 이런 것들이다. 하나님을 알고 있다면 더더욱 “생명의 봄바람, 평화의 꽃바람 되어” 살아야 한다. 나는 앞으로 그렇게 살기를 기도한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마음으로 살기를 기도할 것이다.
오늘도 어딘가엔 “가장 좋은 부분이 빛을 내며 밖으로 나오고 있는 것 같”은 몸짓들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
이 글은 우리집교회 성도인 사라리님께서 작성해주신 것을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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