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너희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좋게 대하여 주고,
또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리하면 너희는 큰 상을 받을 것이요, 더없이 높으신 분의 아들이 될 것이다.
그분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에게도 인자하시다.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누가복음 6:35-36
'원수 사랑'이라고 하면, 기독교의 대표적인 가르침으로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고, 최고의 사랑은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어떤 기독교인도 '원수 사랑'을 당연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야말로 너무나도 어려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냥 닿을 수 없는 것은 알면서도 추구하는 이상향처럼 벽에 걸어두고 가끔 쳐다볼 뿐입니다.
물론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는 이런 사랑의 증거처럼 이야기되는 몇몇 사람들의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자기 아들을 죽인 사람을 양자로 삼았던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이라던가, 종교적 박해를 피해 도망가다가 자신을 쫓아오는 교도관이 얼음물에 빠지자 돌아가서 그를 도와주고 결국엔 사형을 당했다는 어떤 재세례파 신도의 이야기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종종 기사를 통해서도 끔찍한 연쇄살인마를 용서한 가족의 이야기를 보곤 합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감동적인 음악과 함께 신앙을 북돋는 영상으로 만들어져 퍼지곤 합니다.
그런데 원수를 용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거기엔 '자격'의 문제가 따라붙습니다. '니가 뭔데, 그 사람을 용서하냐'는 것입니다. 전에 봤던 어떤 다큐에서 한 아버지는 살인자를 용서한다고 선언한 후 많은 비난을 받았습니다. '진짜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라면 어떻게 그를 용서할 수 있냐'는 말부터 다른 피해자 가족들이나 자신의 가족들로부터 '어떻게 아버지가 그럴 수 있느냐'는 원망을 듣고 관계가 끊어지기도 했다고 합니다. 당장 우리는 [밀양]이라는 영화를 통해 '신이라고 해서 맘대로 용서할 권한이 있는가', '충분한 처벌 없는 용서는 과연 온전한 용서인가'를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과연, '원수 사랑'은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궁극적인 도덕의 정점인 것일까요?
다윗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사무엘서에 보면 이와 비슷하지만 또 다른 상황이 펼쳐집니다. 다윗은 아들인 압살롬의 반역 때문에 궁궐을 비운 채 도망가는 신세가 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얼마 후 그의 병사들이 압살롬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면서 압살롬은 죽고 다윗은 왕권을 되찾게 됩니다. 그런데 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군사들을 맞이하는 것은 승리의 축하가 아니라 '왕의 슬픔'이었습니다. 내전으로 인해 아들을 잃어버려야 했던 '아버지' 다윗이 슬픔을 감추지 못하고 큰소리로 울부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다윗을 향해서 전쟁의 지휘관이었던 요압은 이렇게 말합니다.
임금님께서는 어찌하여 임금님을 반역한 무리들은 사랑하시고, 임금님께 충성을 바친 부하들은 미워하시는 겁니까? 우리 지휘관들이나 부하들은 임금님께는 있으나마나 한 사람들입니까? 임금님께서는 오늘 임금님의 본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차라리 오늘, 압살롬이 살고, 우리가 모두 죽었더라면, 임금님께서는 더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사무엘하 19:6)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 그를 위해 싸운 부하들에게는 부당한 감정으로 여겨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서 압살롬은 왕의 아들이기 전에 그들이 맞서 싸워야 하는 '원수'였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에게만 원수인 것이 아니라 왕에게도 원수였기 때문에 전력으로 싸워서 승리했는데 왕은 마치 우리가 죽고 압살롬이 살아 돌아오길 바라던 사람처럼 슬피 울고 있으니 열이 받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다윗은 그들과 함께 온전히 기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압살롬은 원수이기 이전에 자신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윗이 한 행동을 '원수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정확히 말하면 다윗이 처한 상황은 사랑하는 사람이 원수가 되어버린, 즉 '원수 사랑'이라기보다는 '원수가 된 사랑'의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개인적으로 어려운 상황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관계에 있었던 사람과 문제가 생겨서 마치 원수가 되기라도 한 것 같은 상황을 마주해야 했었습니다. 내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사람인데, 나와 맞서 싸우기라도 할 것처럼 대하는 태도를 보면서 어떻게 그를 대해야 하는지 몰라 굉장히 당황했습니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그냥 안보고 말지 생각했을텐데, 사랑하는 사람이라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속만 타들어 가는 상황들을 겪으면서 다윗의 마음이 이러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봤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이야기 또한 이렇습니다. 그분이 사랑하신 것은 '원수'가 아니라 '원수가 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사랑에 대한 반응은 비극적입니다. '빛이 자기 땅에 왔을 때 자기 백성들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고 요한은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를 용서한다고 해서 그가 잘못을 뉘우칠 것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어쩌면 그는 우리의 이런 결정을 바라보며 비웃거나 무시해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는 그냥 원수인 채로 남아 있습니다. 그 사랑은 '우리가 아직 죄인일 때,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일 때(롬5:8,10)'를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원수 사랑은 그 사랑이 받아들여질 것을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 원수는 여전히 사랑이여서, 언덕에 서서 매일같이 노심초사 하는 바보같은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서 표현될 수 밖에 없습니다. 내가 입은 손해와 부당하게 겪어야 했던 모든 아픔에도 불구하고 냉정하게 그를 끊어내지 못하는 망설임으로 표현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원수 사랑이란 인간의 도덕성을 뛰어넘는 위대한 한 걸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미련이고 머뭇거림이며 짓눌려진 심장을 끌어안고서도 놓아버리지 못하는 애착입니다. 내가 이 모든 것을 끊어버리는 것이 마땅한 상황에도 논리적으로 행동하고 결정할 수 없게 만드는 '상실', '잃어버림'의 상태인 것입니다.
우리가 원수사랑을 고려할 때 생각해야 하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을 [원수]가 아닌 [아들]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입니다. 감정을 삭히거나 관계를 되돌리는 문제가 아니라, 내게 원수된 그 사람을 보며 울고 있는 아버지 다윗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심 같이'라는 말은 그 자비로우심이 '아버지'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결국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아버지를 닮아간다는 것입니다. 도덕적 수준을 높이거나, 선하게 살기 위해 애쓰거나, 해내야 할 규칙을 준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나에게 하신 것처럼 그렇게 망설이고, 머뭇거리며, 단호하지 못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기를 멈출 수 없는 것, 그가 여전히 자녀이고 형제/자매임을 붙들고 밤잠을 설치는 마음입니다.
원수된 우리를 오래참으셨던 그분의 망설임처럼, 나에게 원수된 그가 여전히 그분의 사랑임을 아직은 더 붙잡고 있을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 있길 바랍니다.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미련을 조금 더 버텨낼 수 있길 기도합니다. 바보 같지만 그렇게 살아낼 힘을 우리에게 주시길, 주님 기도합니다.
너는 그들에게 전하여라.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내가 내 삶을 두고 맹세한다.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한다.
너희는 돌이켜라. 너희는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나거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는 왜 죽으려고 하느냐?’ 하여라.
에스겔 33장 11절
이 글은 우리집교회의 성도인 제이팔로님이 써주신 글을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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