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읽은 말씀
시편 106편 1-12절
누가복음 11장 33-36절
요한1서 5장 13-21절
우리집교회의 예배는 한 사람의 설교가 아니라 함께 말씀을 읽고 나누는 이야기들로 구성됩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말씀을 전합니다.
디즈니 만화에는 소원을 들어주는 램프의 요정이 나옵니다. 어떤 소원이든 세 가지를 들어주지요. 그냥 요정에게 "소원을 계속 들어줘"라고 소원을 빌면 될 텐데라는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어떤 소원이든 들어준다는 것은 대단한 행운인 것 같습니다. 만약 내게 이런 행운이 찾아온다면 어떤 소원을 빌고 싶으신가요? 로또 당첨? 사업에서의 성공? 결혼?
요한은 그의 서신의 수신자들에게 무엇이든 그의 뜻대로 구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구한 것은 곧 받을 것이라는 말도 해줍니다. 이것은 정말 엄청난 횡재이지 않습니까? 그걸 들어주시는 분이 하나님이니까 요정보다 더 확실하지 않겠습니까? 자 그럼 이제 어떤 소원을 빌어야 할까요? 그런데, 요한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것을 구하라고 합니다.
누구든지 어떤 교우가 죄를 짓는 것을 볼 때에, (중략) 하나님께 간구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은, 죽을 죄는 짓지 않은 그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후략)(요한1서 5:16)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주실 것이라고 말하면서 돈이나 성공 같은 소원이 아니라 죄를 짓는 형제가 구원받는 소원을 구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무엇이든 들어준다고 하는 마법 같은 일을 눈앞에 두고 그것을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사용하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14절에서 요한이 전제하고 있는 하나의 단어를 볼 수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주시는데, 중요한 것은 그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시편 106편에는 선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요청과 함께 출애굽 당시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말하면서 시작하지만 시편 106편의 전체적인 이야기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그를 떠났던 이야기들의 연속입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시기하고(16절), 하나님을 잊어버리고(21절), 순종하지 않았습니다(25절). 도대체 하나님이 그들을 돌아보실 이유는 없어 보이는 역사입니다. 그런데 시편기자는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노래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런 그들을 건져주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어떠함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시편 기자는 그것이 "주님의 명성을 위해서, 주님의 권능을 알리시려(8절)"고 하셨다고 말합니다. 구원의 목적이 그들에게 있지 않고 그들을 통해 세상이 하나님의 명성과 권능을 알게 하려는 [목적]에 있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이 말하는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과 목적은 누가복음의 이야기 속에 더 명확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이해하는 열쇠는 33절입니다.
아무도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에 놓지 않고,
등경 위에 놓아 두어서, 들어오는 사람들이 그 빛을 보게 한다.(누가복음 11:33)
이 단락에서 예수님은 우리 안에 있는 빛을 등불에 비유해서 말씀하십니다. 문제는 이 빛이 어두워질 수도 있고 밝아질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35절). 우리 밖에 있는 빛이 우리 안을 비춘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 안에 있는 빛을 어떻게 할 것이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무엇보다 이 빛은 '들어오는 사람들이 그 빛을 보게'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목적을 위해서 우리 안에 빛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빛이 말 아래 있으면 빛이 어두워져서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이고, 등경 위에 있으면 빛이 밝아서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해는 이 본문이 앞에서부터 계속 '표적'이라는 주제로 말하는 문맥에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더 명확해 보입니다.
그런데 왜 눈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눈이 우리 마음의 등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빛이 눈을 통해 들어와서 우리 안을 밝혀준다는 뜻으로 이 구절을 이해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눈에는 이런 수동적인 기능뿐 아니라 그 빛을 '바라보는' 적극적 기능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빛을 바라보지 않고 눈을 감거나 고개를 돌리면 그 빛을 볼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빛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빛을 봐야 할 이들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말 아래' 두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시선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시선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곳을 향해 있는 것입니다. 그 빛이 향해야 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려 하나님이 울고 계시는 곳을 바라보며 함께 울고 그분이 기뻐하시는 곳을 바라보며 함께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내 삶을 비추는' 일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그래서 시선을 끊임없이 나에게로 돌립니다. "내 걱정, 내 가족, 내 꿈" 그렇게 등불을 말 아래 두고 거기만 밝히는 것에 몰두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등불을 '말 아래' 두는 것과 같습니다. 진정으로 방을 밝히는 방법은 끊임없이 '나'로 수렴하는 시선을 돌려 그 방에 들어오는 이들을 위해 등불을 켜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선이 그들을 향해야 합니다. 마치 알라딘이 자신의 마지막 소원을 지니를 자유롭게 하는 데에 쓰는 것처럼 말이죠. 그래야 비로소 방 전체가 밝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본래의 목적에 맞는 곳에 등불이 놓일 때 비로소 우리의 방을 '온전히' 밝힐 수 있는 것입니다(눅11:36).
2025년 어떤 소원을 가지고 계신가요? 내 안을 밝히려 나에게만 집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방을 밝히는 방법은 우리의 눈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빛을 보아야 할 이들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될 것을 믿는다면 우리를 그 무엇보다 죄 가운데 있는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이고, 먼저 우리를 밝히신 그분의 빛이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깊은 묵상을 위한 질문
Q1. 2025년 당신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적어보고 그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에 맞는지 생각해 봅시다.
Q2.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Q3. 내 주변에 구원을 위해 기도해야 할 이들이 있습니까? 함께 나눠보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자신이 생각하는 답을 댓글로 달아주세요. 질문 등을 남겨주시면 답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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